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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사순절 새벽묵상 (20260325-수) 스 7:1-10 학사 에스라! ②

김광철 목사
2026/03/25
26
187.♡.♡.9
출처 : Youtube
#사순절 새벽묵상 (20260325-수) 스 7:1-10 학사 에스라! ②
  ■ (스 7:9-10)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 에스라의 집안 소개  오늘 같이 나눌 ‘고난을 통해 열매 맺은 사람’은 학사(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 두 번째 나눔입니다. 
  드디어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의 이름이 등장하는 장이 에스라 7장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특별히 에스라를 소개하는데, 많은 양의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스 7:1절에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하반절부터 5절까지 본문은 에스라의 출신이 어디인지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 7:1-5절에 “(1) ...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代孫)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한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위로 16대손까지 올라가 기록한 성경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까지 기록한 족보 외에는 개인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족보가 동원된 것은 본문이 유일한 부분입니다.
  ■ 1. 하나님으로 정의(定義)되는 집안  왜 이렇게 에스라의 족보를 기록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제일 마지막에 그 이유를 아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에스라는 철저한 믿음의 가정이라는 것을,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사실 포로 생활을 하면서 무슨 직책이나 직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의 가문은 그 대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이어 내려가기 위해, 그 직무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애썼고, 마침내 그 직무를 지켜낸 가문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에스라는 이런 믿음의 배경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런 에스라의 직무(職務)에 대해 느 8:9절에도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고, 느 12:26절에도 “이상의 모든 사람들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때에 있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에스라는 학사였습니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서 정의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정체성은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사장으로 학사로 온전히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 2. 변함없는 믿음을 이어가는 집안  에스라의 족보를 기록한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의 집안은 여전히 변함없는 믿음의 계보를 이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해 선포하려 함이었습니다.
  사실 위에 기록된 사람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멸망을 본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남유다의 멸망을 본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본 제사장이 있습니다. 
  위 본문 1절에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 ‘에스라의 아버지 스라야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에 기록된 ‘-의 아들’, ‘-의 손자’, ‘-의 증손’이라는 말은 모두 히브리어 단어 ‘בֵּן(벤, ben)’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בֵּן(벤, ben)’이라는 단어는 바로 직계 1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의미는 ‘가족’, ‘후손’, ‘자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바로 윗대인 아버지 할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2-3대 윗대인 할아버지를 기록할 수도 있고, 바로 윗대인 아버지를 기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의 다른 번역들을 보면 “살룸의 현손이고 사독의 오 대손이고 아히둡의 육 대손이며,”(바른), “그 윗대는 살룸이요, 그 윗대는 사독이요, 그 윗대는 아히둡이요,”(새번역), “힐기야는 살룸의 아들이고, 살룸은 사독의 아들이며, 사독은 아히둡의 아들입니다.”(쉬운), “the son of Shallum, the son of Zadok, the son of Ahitub,”(NIV), “the son of Shallum, the son of Zadok, the son of Ahitub,”(NKJV), “son of Shallum, son of Zadok, son of Ahitub,”(NRSV), “son of Shallum, son of Zadok, son of Ahitub,”(NLT)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번역 성경들을 보면 개역개정 성경처럼 몇 대손, 몇 대손 이렇게 나열하지 않고, ‘아들’, ‘자손’, ‘son’ 또는 ‘윗대’라는 의미로 헬라어 ‘בֵּן(벤, ben)’을 번역했습니다.
  ■ 아들이라는 뜻의 ‘벤(ben)’의 의미  그러니까 본문에 에스라의 아버지가 스라야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בֵּן(벤, ben)’이라는 단어를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하 25:18-21절에 “(18) 시위대장이 ① 대제사장 스라야와 ② 부제사장 스바냐와 ③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 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④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⑤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⑥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⑦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 유다의 대제사장으로 섬기던 사람이 스라야였습니다. 이 시기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무너지던 마지막 시기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스라야’는 대상 6:14절에 보면 “아사랴는 스라야를 낳고 스라야는 여호사닥을 낳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라야의 아들은 여호사닥이라고 역대상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스 7:1절에서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본문을 보면 ‘스라야의 아들은 에스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대상에서는 ‘스라야의 아들은 여호사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스라야의 아들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בֵּן(벤, ben)’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역대상 6:14절의 본문에서 ‘낳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יָלַד(얄라드, yalad)’로, 이 뜻은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윗대인 1대를 의미하는 의미는 이 ‘יָלַד(얄라드, yalad)’가 더 가까운 뜻입니다.
  연대적으로 봐도 바벨론의 시위대장에 의해 스라야가 죽임을 당할 때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시기가 B.C 586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시기는 아닥사스다 7년이니까 B.C 458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 스라야와 에스라 사이에는 약 128년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의 아버지가 스라야라고 하는 것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기에 주의해서 히브리어 ‘בֵּן(벤, ben)’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에스라의 가문은 남유다가 멸망하시는 시기에도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었고, 그 시기에 바벨론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되는 아픔의 역사가 있는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의 집안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로 시기에 이런 직무가 무슨 소용이 있나?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직무를 지켜 나가다 보니 마침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포로 귀환(B.C 458)  1차 포로 귀환 후(B.C 537) 예루살렘 성전이 많은 어려움을 넘어 완공된 뒤(B.C 515), B.C 458년에 에스라를 중심으로 제2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스 7:9절에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7년 1월 1일에 페르시아를 출발해서, 그해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에스라가 떠난 곳을 페르시아가 아니라 ‘바벨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이미 페르시아에 의해 B.C 539년 멸망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페르시아 안에 있는 바벨론 지역을 ‘바벨론’이라고 그대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바벨론을 떠났다’라는 말은 ‘나라’가 아니라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라는 약 2,0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약 4개월의 여행 끝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 말씀을 따라 산 에스라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스 7: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바벨론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온 이유가 있습니다.
  에스라의 결단과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라는 말은, 다른 번역 성경에는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규례와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바른), “에스라는 주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켰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다.”(새번역), “에스라는 이전부터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겠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우리말), “에스라는 이전부터 온 마음을 다해 주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신실하게 실천했으며,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 율법과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그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다.”(쉬운말), “For Ezra ha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observance of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ing its decrees and laws in Israel.”(NIV), “For Ezra had prepared his heart to seek the Law of the LORD, and to do it, and to teach statutes and ordinances in Israel.”(NKJV), “For Ezra had set his heart to seek the law of the LORD, and to do it, and to teach in Israel statutes and ordinances.”(NHEB), “For Ezra had set his heart to study the Law of the LORD, and to do it and to teach his statutes and rules in Israel.”(ESV), “This was because Ezra had determined to study and obey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 those decrees and regulations to the people of Israel.”(NLT)라고 번역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하고 살았던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 백성들 또한 말씀을 지키며 살 때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  에스라에게는 이렇게 생생한 말씀의 간증, 살아 있는 말씀의 현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 때 주시는 놀라운 복이 있었기에 그 은혜를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누리기를 원했기에 그 말씀을, 말씀의 현장을, 말씀의 복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있는 사람, 은혜가 있는 사람, 간증이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의 은혜와 복을 증거하고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그 말씀은 당연히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 숨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안으로, 말씀의 역사와 은혜와 능력 안으로 이끕니다.
  ■ 마른 뼈도 살아나게 하는 말씀의 능력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들을 향해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겔 37:3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지 에스겔 선지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겔 37:4-6절에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선포하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에스겔은 순종하여 선포합니다. 겔 37:7-8절에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뿐인데, 마른 뼈들이 순종하여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힙니다. 하지만 생기는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겔 37:9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번에도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겔 37:10절에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른 뼈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뿐인데,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에스라는 그 말씀을 잘 배웠고, 그 말씀을 살았고, 그 말씀을 또한 가르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희망은 ‘돈’이나 ‘땅’이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 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가운데 전하고, 그들이 에스겔이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누렸던 놀라운 기적의 일들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선포될 때, 우리의 삶은 움직입니다. 
  ■ 살아 있는 말씀  히 4: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전 1:23-25절에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 반드시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듭남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삽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살고, 그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묵상- 나의 믿음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변하지 않는 믿음입니까?- 나는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전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배우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말씀을 따라 살 때 경험했던 간증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내 삶에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내 삶을 통해 선포되고 있습니까?
  ■ 함께 할 기도1. 세계를 품은 기도 – 제리 목사2. 과달라하라 1323 스테이션(검정고시학교, 기술학교와 신학교)을 건축할 계획입니다. 설계와 모든 땅 서류 준비에서부터 모든 과정들이 순조로이 잘 이루어지도록3. 로뎀교회를 구매할 계획을 가지고 3월에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도록 4. 귀한 사역에 동역할 신실한 동역자를 보내주시기를5. 우리가 섬기고 기도하는 선교지, 선교사님들, 단체와 교회 위해6. 우리 자녀들을 위해(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살도록)7. 로뎀교회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장학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데, 믿음의 자녀들이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통로가 되도록8. 브링업 이재홍 내일 장학회를 통해 3월에도 선교사님 2가정의 자녀들을 선정해서 4월에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합니다. 선교의 현장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9.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는 하루가 되도록
행복한 교회(Happy Diaspora Fellow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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